아르메니아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세계 최초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서기 301년, 로마 제국보다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 나라는 오늘날까지도 깊은 신앙심과 풍부한 기독교 전통을 지닌 사회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부활절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신앙적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이며, 단순한 종교 행사를 넘어서 문화적 축제이자 가족 공동체의 큰 의례로 여겨진다.
부활절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을 넘어서, 희생, 용서, 재생, 생명의 승리를 체험하고 나누는 시간이다. 이 시기를 맞아 아르메니아 가정에서는 정성스럽게 부활절 식탁을 차리고,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담은 전통 요리들을 준비한다. 그중에서도 ‘츄레그(Choreg)’라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달콤한 빵은, 부활절을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음식 중 하나로 손꼽힌다.
츄레그는 겉모습만 보면 단순한 브리오슈나 달콤한 빵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예수의 고난과 부활, 삼위일체, 빛의 도래 등 깊은 기독교적 상징이 녹아 있다. 이 글에서는 아르메니아 부활절의 전통과 츄레그의 유래 및 조리법, 그리고 이 빵이 지닌 신앙과 공동체적 의미를 네 개의 문단에 걸쳐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아르메니아 부활절: 희생과 구원의 신비가 녹아든 민족 최대의 신성한 절기
부활절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Armenian Apostolic Church)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행사로 여겨진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이 명절을 단순한 연휴로 취급하지 않고, 절제와 경건, 참여와 순종의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부활절을 앞둔 약 40일간은 ‘메즈 바크(Medz Bahk)’라는 대사순절 기간으로, 신자들은 육식을 끊고 기도와 자선을 통해 자신을 비우는 시간을 가진다.
사순절이 끝나면 부활절 주간에 접어들고,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리는 성금요일, 그리고 부활을 기리는 성야 미사가 이어진다. 부활절 당일 새벽, 교회에서는 ‘빛의 미사(Liturgy of Light)’가 열리며, 어두운 교회 안이 서서히 촛불과 햇빛으로 밝아지는 의식은 생명의 부활과 희망의 도래를 상징한다.
이 시기에 아르메니아 가정에서는 각종 전통 음식을 준비하며 가족과 이웃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특히 부활절 당일에는 빨갛게 물든 달걀, 고기 요리, 허브 샐러드, 장식된 빵과 디저트가 식탁 위에 오르며, 이 모든 음식들은 종교적 상징을 담고 있는 구성이다. 그중에서 빵은 가장 중심에 놓이며, 츄레그(Choreg)는 부활절 식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층층이 꼬아 만든 츄레그는 아르메니아 부활절만의 고유한 전통이며, 그 모양과 재료, 향신료 선택까지 하나하나에 기독교적 의미와 문화적 정체성이 녹아 있다. 츄레그는 먹는 음식이면서 동시에 신앙의 표현, 가정의 정성, 공동체의 연결 고리인 셈이다.
츄레그(Choreg)의 유래와 조리 방식: 믿음을 굽는 손길
츄레그(Choreg)는 아르메니아 전통 달콤한 이스트 빵으로, 주로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와 같은 종교 명절에 만들어진다. 그 유래는 고대 기독교 초기 공동체의 성찬빵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이후 시간이 흐르며 아르메니아 민속 문화와 결합해 오늘날의 형태로 발전했다.
츄레그의 재료는 기본적으로 밀가루, 이스트, 우유, 달걀, 설탕, 버터 등으로 구성되며, 여기에 특별한 향신료인 ‘마흘레브(Mahlab)’ 또는 ‘마흘레프’라 불리는 체리씨 가루가 추가되기도 한다. 마흘레브는 단맛 속에서도 은은한 꽃향기와 견과류의 깊은 풍미를 더해주며, 신성한 공간을 연상시키는 향을 가지고 있어 기독교 의례 음식에 자주 사용된다.
츄레그의 가장 큰 특징은 반죽을 세 가닥으로 나누어 꼬아 만든 모양이다. 이 꼬임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기독교의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를 상징하는 상징적 구조이다. 또한 빵의 겉면에 발라지는 달걀 노른자와 참깨는 햇빛과 생명의 씨앗을 의미하며,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부활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요소다.
조리 방식도 특별하다. 반죽을 최소 두 시간 이상 발효시킨 뒤, 꼬아 말아 구워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빵보다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이 요구된다. 일부 가정에서는 츄레그 반죽을 하며 성호를 긋고 기도를 바치는 전통도 남아 있어, 조리 행위 자체가 하나의 신앙적 수행으로 여겨진다. 츄레그는 그렇게 시간, 정성, 신앙이 어우러진 음식이며, 한 조각의 빵 속에 종교와 문화를 함께 굽는 전통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츄레그의 공동체적 상징성과 현대 아르메니아 가정에서의 의미
츄레그는 단순히 가족이 먹는 명절 음식이 아니라, 부활절을 기점으로 관계를 회복하고 신앙을 재확인하는 공동체적 도구로 기능한다. 부활절을 앞둔 며칠 동안, 아르메니아 여성들은 이웃과 친척에게 나눠줄 츄레그를 수십 개씩 구워낸다. 이는 단지 음식 나눔이 아니라, 사랑과 존중, 평화를 전하는 상징적 행위로 여겨진다.
또한 교회에서는 성찬 예식 후 신자들에게 축복받은 츄레그를 나누어주는 전통이 있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을 통해 신자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 가족은 이 빵을 첫 식사로 나누며 서로에게 축복을 전하고,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친척이나 이웃과 화해를 청하는 문화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현대의 도시 생활 속에서도 이 전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바쁜 일상과 상업화된 명절 분위기 속에서도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수제 츄레그를 직접 굽고, 전통적인 방식의 꼬임과 향신료를 고수한다. 특히 이민자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서는 츄레그가 조국과 신앙, 가정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도구로 큰 역할을 한다.
부활절 식탁의 중앙에 놓인 츄레그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한 해의 희생과 시련을 기억하고, 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맞이하자는 공동체적 의지의 상징이다. 그 속에는 종교의 신비,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세대를 잇는 사랑이 함께 들어 있다.
아르메니아의 부활절은 단순한 종교 기념일을 넘어, 삶의 방향을 다시 정렬하고 신과 공동체, 가족과 화해하는 거룩한 시간이다. 그 한복판에 놓인 츄레그(Choreg)는 단지 맛있는 빵이 아닌, 수백 년의 신앙과 문화, 정성과 소망이 결합된 음식 유산이다.
빵의 꼬임 속에는 삼위일체의 신비와 믿음의 끈이 담겨 있고, 그 황금빛 겉면에는 생명과 부활의 찬란함이 드러난다. 츄레그는 그렇게 아르메니아의 부활절 식탁 위에서 신앙을 먹고, 문화를 나누며, 공동체를 회복하는 상징적 매개체로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