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와 코카서스 산맥 사이에 위치한 유라시아의 교차점이다. 이 지역은 수천 년에 걸쳐 다양한 민족과 종교, 문화가 공존해왔으며, 그만큼 풍부한 전통과 의례가 살아 숨 쉬는 나라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명절 중 하나는 바로 노루즈(Novruz)다. 노루즈는 페르시아 달력에 따른 봄의 시작이자 새해를 알리는 명절로, 매년 3월 20일경 춘분을 기준으로 시작된다.
노루즈는 단순한 새해맞이 명절이 아니다. 이 날은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재생을 기리는 시간으로 여겨지며, 생명력, 정화, 가족 화합이라는 상징성이 담겨 있다. 전통적으로 노루즈 전후로 아제르바이잔의 가정에서는 집 안을 청소하고, 불을 피우며, 다양한 전통 음식과 디저트를 준비한다. 그리고 그중 가장 상징적인 음식이 바로 사브지 폴로(Sabzi Polo)다.
사브지 폴로는 다양한 허브를 넣어 지은 향기로운 밥으로, 봄의 푸르름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음식이다. 이 요리는 단순한 밥이 아니라, 노루즈의 정신과 아제르바이잔인의 철학이 녹아 있는 상징적인 식사로 간주된다. 본 글에서는 아제르바이잔 노루즈의 역사적 의미와 함께, 사브지 폴로라는 음식에 담긴 자연과 조화, 가족, 재생의 철학을 네 개의 문단으로 나누어 깊이 있게 살펴본다.
아제르바이잔 노루즈의 기원과 의례
노루즈는 본래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서 유래한 명절로, 지금은 이란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코카서스 지역의 여러 나라에서 기념된다.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노루즈는 단순한 연휴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봄의 도래를 알리는 가장 성스러운 시기로 여겨진다. 노루즈는 약 3천 년 전 조로아스터교에서 시작되었으며, 불을 통한 정화 의식, 햇볕의 부활, 생명의 순환을 기념하기 위해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노루즈를 맞이하여 불을 뛰어넘는 의식, 촛불 점화, 봄맞이 청소, 집안 장식, 가족 모임 등 다양한 전통 행사가 이어진다. 특히 노루즈 전 4주간 화요일마다 물, 불, 흙, 바람의 정령을 기리는 ‘차르샴바(Charshanba)’ 행사가 진행되며, 이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상징하는 신앙적 실천이다. 이러한 일련의 전통 속에서 음식은 가장 중심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노루즈에는 사브지 폴로 외에도 쿠타브(Kutab), 샤칼부라(Shakarbura), 파흘라바(Pahlava) 같은 전통 디저트가 준비되며, 이들 모두는 가정의 번영과 단란함, 새해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사브지 폴로는 노루즈 당일 저녁, 가족이 모두 모여 나누는 중심 요리로, 봄의 생명력과 정화, 그리고 새 출발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사브지 폴로를 먹는 행위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신과 자연, 조상, 공동체가 한데 연결되는 의례적 행위이며, 노루즈의 모든 철학이 이 한 그릇의 밥 속에 응축되어 있다. 이 밥은 녹색으로 물들어 있으며, 향긋한 허브 냄새는 곧 새봄의 냄새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사브지 폴로가 노루즈의 정수를 대변하는 음식으로 여겨진다.
사브지 폴로의 재료와 조리 방식: 봄의 향기와 생명의 색
사브지 폴로(Sabzi Polo)는 페르시아어에서 ‘사브지’는 허브나 채소, ‘폴로’는 쌀밥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브지 폴로는 다양한 신선한 봄 허브를 쌀과 함께 요리한 향긋한 밥 요리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 요리에 파슬리, 고수, 딜(딜잎), 부추, 시금치 등을 넣고 쌀과 함께 조리하며, 종종 강황이나 사프란을 더해 노란빛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허브들은 봄철에 갓 수확된 신선한 채소로, 자연의 생기와 정화의 기운을 담고 있는 재료들이다. 각각의 허브는 독소 배출, 면역력 강화, 혈액 순환 개선 등 건강적 효능이 풍부할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새로운 시작과 몸과 마음의 정화, 정직한 삶의 기원을 담고 있다. 실제로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사브지 폴로를 먹으며, “이 밥을 먹고 나면 지난해의 묵은 기운이 씻겨 나간다”는 말을 자주 한다.
사브지 폴로는 단순히 밥에 허브를 넣어 지은 음식이 아니다. 정통 방식에서는 쌀을 삶은 뒤 물기를 제거하고, 여러 겹으로 허브와 교차시켜 쌓아 올리는 ‘층층 요리법’을 사용한다. 밥 아래에는 얇게 썬 감자나 얄팍한 빵을 깔아 ‘타디그(Tahdig)’라는 바삭한 밥 누룽지를 만든다. 이는 가족 간의 인기 메뉴로, 바삭함 속에 쫄깃한 밥과 허브의 향이 함께 어우러지는 별미로 꼽힌다.
또한 사브지 폴로는 단독으로도 먹지만, 보통은 생선 요리(주로 흰살 생선 튀김)와 함께 제공된다. 이는 물의 생명력과 땅의 곡식이 조화를 이루는 상징이며, 자연과 인간, 해양과 대지,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되는 화합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사브지 폴로는 재료 자체의 맛도 뛰어나지만, 철학적 깊이와 상징성을 겸비한 음식이라는 점에서 노루즈와 특별히 맞닿아 있다.
사브지 폴로를 둘러싼 가족과 공동체의 상징성
사브지 폴로는 아제르바이잔 가정에서 단순한 명절 음식이 아니라, 가족의 단합과 공동체 결속을 상징하는 문화적 도구로 여겨진다. 노루즈가 다가오면 대부분의 가정은 며칠 전부터 허브를 씻고 다듬으며, 쌀을 불리고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을 함께 한다. 이때 어머니는 조리의 중심, 자녀들은 재료 손질의 도우미, 아버지는 손님맞이와 분위기 조성자로 역할이 나뉘며, 가족 전체가 요리 행위에 참여한다.
이러한 협업은 단순한 가사 노동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교류하고 정을 나누는 문화적 의례이다. 요리를 통해 세대 간 경험이 전해지고, 할머니가 손녀에게 허브 써는 법을 가르치거나, 어머니가 전통 조리법을 구술로 전달하는 장면은 아제르바이잔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브지 폴로가 완성된 후, 가족은 식탁에 둘러앉아 첫 밥을 나누며 새로운 해의 시작을 함께 맞는다. 이때는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고, 지난 해의 갈등을 정리하며, 새해의 건강과 평화를 기원하는 시간을 갖는다. 일부 가정에서는 첫 숟가락을 먹기 전, 고요하게 소원을 빌거나 묵념하는 전통도 남아 있다.
또한 사브지 폴로는 이웃과 나누는 음식으로도 활용된다. 명절 전후로 이웃에 음식을 덜어 보내거나, 어려운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문화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사브지 폴로가 단지 가족만의 음식이 아니라, 공동체와 생명을 연결하는 고리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아제르바이잔의 노루즈는 자연과 인간, 과거와 미래, 정성과 철학이 교차하는 민속적 새해 명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브지 폴로라는 특별한 밥이 있다. 이 밥은 단순히 향긋한 허브밥이 아니라, 생명의 회복, 정화, 가족 사랑, 공동체 정신을 상징하는 상징적 음식이다. 사브지 폴로 한 그릇에는 자연의 생기와 사람들의 소망, 그리고 문화를 계승하는 전통의 힘이 담겨 있다.
노루즈의 식탁에서 사브지 폴로를 먹는 순간,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그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갈지 다짐하고, 가족과 이웃의 평안을 기원하며,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다시금 기억한다. 이러한 이유로 사브지 폴로는 명절 요리 그 이상이며, 아제르바이잔 문화의 핵심 정신을 담은 살아 있는 음식 유산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