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서 가장 경건하고 신성한 명절 중 하나는 바로 “프쭘번(Pchum Ben)”이다. 프쭘번은 매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 음력 달력에 따라 약 15일 동안 이어지며, 불교적 공덕 실천과 조상 숭배가 결합된 특별한 의례 기간이다. 이 시기에는 전국의 사찰과 가정에서 조상들의 혼령을 위한 기도와 공양이 이루어지며, 죽은 자와 산 자가 영적으로 만나는 시간으로 여겨진다.
프쭘번은 단지 슬픔의 날이 아니다. 오히려 감사와 존경, 윤회와 업장의 정화, 공동체적 기억의 실천이라는 상징이 깃든 명절이다. 그리고 이러한 깊은 의미는 무엇보다 음식을 통해 실현된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이 시기에 조상을 위한 공양 음식, 승려를 위한 보시 음식, 이웃과 나누는 축제 음식을 준비함으로써 육체적 정성과 영적 수행을 결합한다.
프쭘번의 음식은 단순히 절에서 먹는 공양식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 시간과 기억, 인간과 신성의 경계를 허물고 연결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이 글에서는 프쭘번의 유래와 종교적 의미, 그리고 대표적인 조상 공양 음식과 현대 사회에서의 변화 양상을 4단락에 걸쳐 깊이 있게 살펴본다.
프쭘번의 유래와 불교적 세계관에서의 의의
프쭘번은 캄보디아 상좌부 불교(Theravāda Buddhism)의 가르침과 토착 신앙인 조상 숭배 전통이 융합된 독특한 축제다. 이 명절의 뿌리는 부처의 제자였던 목갈라나(Moggallana)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그는 신통력을 얻은 후 어머니의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녀를 구제하기 위해 부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부처는 그에게 “공덕을 쌓아 다른 중생과 나누라”고 말했고, 이것이 공양과 보시의 시작이 되었다.
이 신화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업(karma), 윤회(samsara), 공덕(merit) 개념을 명확히 반영한다. 프쭘번은 이 개념을 실천하는 대표적인 명절로, 살아 있는 자가 조상과 망자를 위해 선한 행위를 쌓고 그 공덕을 전해주는 의례다. 프쭘번 기간 동안 캄보디아 사람들은 사찰을 찾아 아침 일찍 공양을 드리고, 조상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한다.
15일 중에서도 마지막 3일은 특히 중요하며, 이때는 전국의 모든 사찰이 조상 제사를 위해 개방된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이 시기 동안 최소 7개 이상의 사찰을 방문해야 조상에게 충분한 공덕이 전해진다고 믿는다. 이처럼 프쭘번은 단지 개인의 종교 행위가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가 조상에게 합심하여 공덕을 전하는 거룩한 시간이다.
이러한 종교적 의식은 결국 공양 음식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실현된다. 음식은 공덕을 실어 나르는 실질적인 수단이며,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은 산 자의 사랑과 망자의 안식을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음식 없이는 프쭘번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쭘번 대표 음식과 조상 공양 상차림의 구성
프쭘번의 핵심은 ‘밥을 올리는 행위’에 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이 시기에 ‘바이 벤(Bay Ben)’이라는 특별한 공양용 밥을 만들어 조상에게 바친다. 바이 벤은 손바닥으로 둥글게 빚은 찹쌀밥으로, 참깨나 코코넛, 검은콩, 바나나잎을 곁들여 찌거나 구워서 만든다.
이 밥은 종종 사찰에 들고 가거나, 집 앞 마당 또는 사원 근처에 조상의 혼이 다녀간다는 믿음을 따라 흩뿌려 놓는다. 이 행위는 혼령에게 음식이 도달하도록 영적인 문을 열어주는 상징적 의식이며, 마치 하늘로 향하는 편지와도 같은 정성을 표현한다.
또한 프쭘번 기간에는 ‘놈 앤썽(Nom Ansom)’이라는 전통적인 찹쌀떡이 필수 음식으로 등장한다. 이 음식은 바나나잎에 싸서 찹쌀과 코코넛밀크, 검은콩, 바나나 또는 돼지고기를 넣고 몇 시간 동안 쪄서 만든다. 안썽은 둥근 원통형으로, 윤회와 순환을 상징하며, 가족의 화합과 장수를 기원하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전통 음식인 ‘놈 콤(Nom Kom)’은 피라미드 형태의 찹쌀떡으로, 결혼식이나 조상 제사 등 여성의 순결과 가정의 번영을 기원하는 상징적 음식이다. 프쭘번에서는 이 떡 역시 영혼을 위한 정결한 음식으로 사용된다.
이 외에도 프쭘번 상차림에는 열대과일, 말린 과자, 설탕 조림, 코코넛 우유를 곁들인 단팥죽, 쌀국수 요리 등 다양한 음식이 올라간다. 모든 음식은 채식 위주로 구성되며, 이는 불교의 불살생 교리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음식의 모양, 색, 맛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정성과 신앙이다. 조상을 위한 상차림은 보여주기식이 아닌, 진심을 담은 헌물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공양과 나눔의 의미: 프쭘번 음식의 공동체적 실천
프쭘번의 음식은 개인적인 제사 행위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 전체가 연결되는 나눔의 실천으로 확장된다. 많은 가정이 자신이 만든 음식을 사찰에 기증하거나, 동네 노인과 승려,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는 행위를 실천하며, 이를 통해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적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구현한다.
사찰에서는 프쭘번 기간 동안 특별한 대중 공양이 열리며, 수백 명의 신도와 방문객이 함께 앉아 한 그릇의 밥과 국, 전통 과자, 열대 과일을 나누며 기도한다. 이 자리에서는 계급, 직업, 신분 구분 없이 모두가 동등한 마음으로 조상과 고인을 기억한다.
특히 공양의 시작 전에는 음식 앞에 조상의 이름을 붙이거나, 혼령을 위한 간단한 제문을 읊는 의식이 있다. 이는 이 음식이 단지 먹는 것이 아니라, ‘전달되는 행위’임을 명확히 인식하게 해준다. 즉, 음식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되는 신성한 도구가 된다.
프쭘번에서는 “나눔이 곧 공덕”이라는 개념이 매우 강하게 작용하며, 이에 따라 일부 가정에서는 의도적으로 여유 있게 음식을 준비해 이웃과 나누는 행위를 당연하게 여긴다. 지역 공동체 안에서는 음식을 빌려주고 돌려주는 ‘식사 순환 관습’이 존재하며, 이때 음식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정성과 사랑, 기억과 감사의 상징으로 이해된다.
현대에 들어서는 NGO나 청년 불교 단체들이 프쭘번에 무료 급식이나 음식 나눔 봉사활동을 함께 진행하고 있으며, 일부 호텔이나 식당에서는 프쭘번 전통 음식을 소개하는 뷔페 행사를 통해 전통을 계승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음식이 단순한 제물의 기능을 넘어, 문화 유산으로서 살아 숨 쉬는 증거이기도 하다.
프쭘번은 단지 제사의 날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살아나게 하고, 조상의 은혜를 되새기며, 나눔을 통해 공덕을 실천하는 종합적인 의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음식이 있다. 프쭘번의 공양 음식은 불교의 철학과 캄보디아 민속의 전통이 만나는 실천적 행위이며, 사랑과 정성, 공동체 정신이 담긴 문화의 결정체다.
이 음식은 조상에게는 위안과 평화를, 산 자에게는 기억과 덕을, 사회 전체에는 연대와 배려를 제공하는 신성한 매개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