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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나라별 명절 음식과 그 의미 - 필리핀 크리스마스 음식과 가족

leostory-1 2025. 7. 26. 19:03

 

필리핀은 세계에서 가장 길고 열정적인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나라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나라가 12월 중순부터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것과 달리, 필리핀은 매년 9월부터 12월까지 무려 4개월간 크리스마스 시즌을 즐긴다. 이 시기를 'Ber Months(ber로 끝나는 월)'라고 부르며, 마트나 거리, 집 안 곳곳이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물들고, 가족 중심의 모임과 음식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필리핀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단순히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가 하나로 모이는 가장 따뜻한 시간이다. 특히 “노체 부에나(Noche Buena)”라고 불리는 크리스마스 전야 만찬은 필리핀 음식문화의 정수이자, 가족 애정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본 글에서는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전통 음식과 그것이 반영하는 가족 중심 문화, 공동체적 가치를 깊이 있게 탐구해본다.

 

필리핀 크리스마스 음식

노체 부에나(Noche Buena): 밤을 밝히는 크리스마스 음식과 가족의 식탁

 

필리핀의 크리스마스는 12월 24일 자정 무렵의 ‘노체 부에나’ 만찬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 만찬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전통으로, 현재는 필리핀 고유의 문화와 결합되어 독자적인 크리스마스 식사 형태로 자리 잡았다. 가족들은 24일 밤, 성당에서 열리는 미사 데 갈로(Misa de Gallo) 또는 심방 가비(Simbang Gabi)라는 밤샘 미사를 드린 후, 자정 무렵에 모두 모여 함께 식사를 하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

노체 부에나는 단순한 만찬이 아니다. 그것은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나누는 연대의 순간이며, 설령 경제적 여유가 없어도 이 만찬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문화적 무게를 지닌다. 도시에서 일하던 가족들도 이 시기에 맞춰 고향으로 돌아오고,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가 식탁에 꼭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이 식사는 보통 자정 이후까지 이어지며,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정성껏 준비된 전통 음식들이 풍성하게 차려진다.

노체 부에나는 또한 가족 간의 용서와 화해, 축복의 시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년 동안 있었던 오해나 갈등을 이 자리에서 털어버리고, 새해를 새 마음으로 맞이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 음식은 단순한 식량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 용서와 감사, 사랑과 화해가 담긴 ‘문화적 상징물’로 작용한다. 필리핀 사회에서 이처럼 강력한 가족 중심 문화가 유지되는 배경에는 크리스마스와 노체 부에나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필리핀의 대표 크리스마스 음식과 그 상징성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식탁은 전통과 현대, 서양과 현지 문화가 결합된 다양하고 풍부한 음식들로 구성된다. 가장 대표적인 음식 중 하나는 레촌(Lechon)이다. 레촌은 통돼지를 통째로 구운 요리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것이 특징이며, 필리핀의 잔치 음식 중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이 음식은 공동체와 가족을 위한 ‘큰 선물’로 여겨지며, 한 가족이 아닌 여러 집안이 공동으로 준비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상징성이 크다.

또한 함(Ham), 케소 데 볼(Queso de Bola, 공 모양의 에담치즈) 역시 빠질 수 없는 크리스마스 대표 음식이다. 특히 케소 데 볼은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은 음식으로, 붉은 왁스에 감싸인 둥근 치즈는 부와 행운, 완전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마트마다 케소 데 볼이 쌓여 있는 모습은 필리핀 겨울 풍경의 일부다.

디저트로는 우베 할라야(Ube Halaya)와 부코 살라드(Buko Salad)가 인기가 많다. 우베 할라야는 보라색 고구마를 삶아 설탕, 연유, 버터와 함께 졸인 달콤한 퓨레 형태의 디저트로, 그 자체로 시각적·미각적 풍요로움을 선사한다. 부코 살라드는 젤리, 열대과일, 코코넛 스트립, 연유, 크림 등을 섞어 만든 과일 샐러드로, 모두 함께 준비하고 나눠 먹는 과정이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더해준다.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음식은 단순히 먹는 행위 그 이상을 의미한다. 각각의 음식에는 풍요, 감사, 가족애, 희망이 담겨 있으며, 이를 함께 준비하고 나누는 과정 자체가 문화적 교육이자 정체성의 표현이 된다. 이러한 상징성을 통해, 크리스마스 음식은 필리핀인들에게 ‘가족 중심 사회’의 구체적인 표현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공동체와 나눔을 강조하는 필리핀 크리스마스의 정서

 

필리핀의 크리스마스는 단지 가족만의 축제가 아니다. 이웃, 친척, 지역 공동체 전체가 함께하는 ‘사회적 연대의 시기’로 여겨진다. 많은 가정에서는 음식을 넉넉히 준비해 이웃과 나누고, 거리의 아이들에게 간식이나 작은 선물을 전하는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음식을 통한 나눔의 실천은 필리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전통이며, 크리스마스는 그 절정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또한 기업, 학교, 교회, 지방정부 등에서는 ‘크리스마스 파티’와 ‘기부 행사’를 통해 지역 사회와의 유대를 강화한다. 특히 “아기 예수에게 선물을 드리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자”는 종교적 메시지가 널리 공유되어, 크리스마스는 ‘받는 기쁨’이 아니라 ‘주는 기쁨’을 실천하는 시간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배경에는 가톨릭 신앙의 영향과 필리핀 특유의 공동체 중심 문화가 결합되어 있다.

음식은 이러한 공동체 나눔의 핵심 수단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웃끼리 음식을 바꾸어 나눠 먹는 ‘팔리탕-우람(Palitan ng Ulam, 반찬 교환)’ 문화가 남아 있으며, 거리에는 아이들을 위한 무료 식사 나눔 부스도 운영된다. 이처럼 크리스마스의 음식은 단지 가정의 내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로 확장되는 매개체가 되며, 연대와 공감의 통로로 기능한다.

음식을 매개로 하는 이 나눔의 전통은 필리핀의 크리스마스가 단순한 종교적 행사나 소비 중심의 명절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깊은 정서적 장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문화는 가족 중심 문화와 공동체 중심 문화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현대화와 글로벌화 속 필리핀 크리스마스 음식 문화의 변화

 

현대화와 글로벌화의 영향으로,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음식 문화도 점차 변하고 있다. 이전에는 전통 음식을 직접 만들어 가족과 나눠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요즘은 배달 음식, 외식, 고급 레스토랑 예약 등이 증가하고 있다. 또한 젊은 세대는 SNS를 통해 트렌디한 크리스마스 디저트나 해외 요리를 공유하면서, 전통 음식보다 시각적, 감각적 만족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필리핀 크리스마스 문화의 중심에는 가족과의 만남, 정성스런 준비, 정겨운 나눔이 자리하고 있다.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인해 가족 단위가 작아지고, 외국에서 일하는 ‘OFW(Overseas Filipino Workers)’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들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화상 통화로 노체 부에나에 참여하거나, 미리 송금해 고향 식탁에 함께하는 느낌을 공유하려 한다. 이처럼 크리스마스 음식은 공간을 넘어 심리적 유대와 문화적 연결을 이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정부와 민간단체도 전통 음식 문화를 계승하고자 다양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학교에서는 크리스마스 음식 만들기 수업, 지역 요리 경연대회, 전통 디저트 전시회 등을 통해 어린 세대에게 가족 중심 문화의 가치와 음식을 통한 공동체 경험을 전달하려 노력한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는, 가정에서 전통 음식을 다시 직접 만들고 함께 식사하는 문화가 부활하면서 전통 회귀 현상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음식 문화는 변화 속에서도 가족 중심과 나눔 중심의 핵심 가치를 지켜내며 진화하고 있다. 그 밥상 위에는 단지 음식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기억, 신앙, 공동체에 대한 깊은 철학이 함께 담겨 있다.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음식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그것은 가족이 모이고, 나누고, 함께 웃는 순간을 만드는 문화적 의식이자 공동체적 실천의 도구다. 노체 부에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크리스마스 음식 문화는 가족애, 신앙, 사회적 연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오늘날에도 그 정신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