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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나라별 명절 음식과 그 의미-스리랑카 신년 축제 음식 키리밧

leostory-1 2025. 7. 25. 18:00

 

스리랑카는 다문화 국가이지만, 그 중심에는 불교 중심의 전통문화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매년 4월 중순에 맞이하는 싱할라·타밀 신년(Sinhala and Tamil New Year)은 스리랑카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민속 명절이다. 이 명절은 단지 달력의 전환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천체 운동, 불교 전통, 농경주기, 가족문화가 총체적으로 결합된 독특한 문화행사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모든 의미는 단 하나의 음식, ‘키리밧(Kiribath)’이라는 간단한 밥 요리에 함축되어 있다. 키리밧은 신년 첫 식사로 반드시 차려지는 코코넛 밀크로 지은 쌀밥으로, 겉보기에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스리랑카인의 삶의 철학, 불교적 가치, 공동체 정신이 깃들어 있다. 본 글에서는 신년 명절의 음식으로서 키리밧이 지닌 의미와 그것이 불교적 가치관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스리랑카 신년 음식 키리밧

 

스리랑카 신년과 키리밧의 상징적 위치

 

스리랑카의 새해는 매년 4월 13일 혹은 14일 전후로 찾아오며, 이는 태양이 물고기자리에서 양자리로 이동하는 순간을 기준으로 한다. 불교 문화가 뿌리 깊은 스리랑카에서는 이 천체의 이동이 자연 순환의 시작이자 삶의 재출발을 의미하며, 이에 맞춰 가족, 친지들이 함께 모여 신년을 맞이한다. 이 시기에는 ‘낙 벨라(Nakath time)’라는 길한 시간이 천문학적으로 정해지고, 그 시간에 맞춰 불을 지피고, 음식을 만들고, 첫 식사를 하는 일련의 의식이 진행된다.

이 때 등장하는 대표 음식이 바로 키리밧(Kiribath)이다. 키리밧은 ‘키리(Kiri, 우유)’와 ‘밧(Bath, 밥)’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말로, 직역하면 ‘우유밥’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찹쌀 혹은 일반 쌀을 코코넛 밀크에 넣어 지은 쌀밥 형태의 음식이며, 주로 사각형 또는 마름모 모양으로 썰어 차려낸다. 신년 아침 첫 번째 불로 조리된 이 음식은 삶의 새 출발을 상징하는 동시에, 신과 조상, 가족에게 드리는 가장 순결한 공양물로 여겨진다.

특히 키리밧은 신년 첫 식사로서 반드시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나눠 먹는다. 이는 단지 식사를 하는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적 유대감과 가족 중심 문화, 조상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실천하는 상징적 행위로 간주된다. 키리밧은 말 그대로 새해 첫 ‘복을 나누는 밥’이자, 스리랑카인의 정신적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키리밧의 조리 과정과 불교적 상징성 

 

키리밧은 단순한 쌀밥 요리가 아니다. 조리 과정 자체가 정결과 집중, 절제와 공덕 실천의 정신을 반영한다. 먼저 쌀을 물에 충분히 불리고 깨끗이 씻은 다음, 물과 함께 끓이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코코넛 밀크를 첨가해 마지막 단계에서 윤기와 향을 더한다. 코코넛은 스리랑카에서 성스러운 나무로 여겨지는 생명의 상징이며, 코코넛 밀크는 ‘자연의 자비’라 불릴 정도로 신성하게 여겨진다.

이렇게 완성된 키리밧은 일반 밥보다 찰기가 있으며, 사각형이나 마름모꼴로 정성스럽게 썰어 접시에 담는다. 이 형태는 ‘균형’과 ‘조화’를 상징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의 철학과도 연결된다. 불교는 지나친 욕망이나 극단적 금욕을 경계하고, 적절한 균형을 통해 삶의 진리를 깨닫는 것을 강조하는데, 키리밧은 이러한 철학을 요리 형태와 조리법으로 은유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키리밧은 신년 아침 불단(Buddha Shrine)이나 가정의 제단에 먼저 바쳐지는 음식 중 하나다. 이는 ‘받은 것을 먼저 돌려드린다’는 공덕의 정신, 즉 ‘다나(Dāna)’를 실천하는 방식이며, 신에게 바친 후 가족이 나눠 먹는 구조를 통해 불교의 연기(緣起)와 상호의존 개념을 음식 문화 속에 녹여낸다. 키리밧을 먼저 신에게 바치고, 이후 부모와 어른, 그리고 아이 순으로 나눠 먹는 구조는 불교적 질서와 존중의 철학이 실생활에 적용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키리밧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스리랑카 불교 사회에서 인간과 자연, 신과 인간, 세대 간 존중이 실현되는 음식적 상징물로 기능한다.

 

신년 음식문화에 담긴 공동체 가치와 불교 실천 

 

스리랑카의 신년 음식 문화는 단순히 개인적인 즐거움이나 가족 간 이벤트가 아니라, 불교적 공동체 정신의 실천 무대다. 신년 아침에 키리밧을 조리하고 나눠 먹는 행위는 ‘베살(vesak) 정신’, 즉 자비와 나눔, 깨달음의 실천을 음식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신년에는 키리밧 외에도 콤부 앗다(Konbu Atta, 향신료 볶음밥), 라두(Laddu, 전통 디저트), 바나나 튀김, 무르쿠(Murukku, 튀긴 스낵) 같은 음식이 함께 준비되지만, 키리밧은 모든 음식의 시작점이다. 이 음식은 마을 어른에게 공양되거나, 빈자에게 나눠주는 다나 활동의 중심이 되며, 불교 사찰에서도 키리밧을 신도들에게 나누며 공덕을 쌓는 행위가 이루어진다.

불교에서는 ‘보시’와 ‘나눔’이 신행의 실천이며, 특히 신년과 같은 길일에는 이러한 행위가 더 큰 공덕을 가져온다고 믿어진다. 키리밧을 만든 후 친척이나 이웃에게 가져다주는 관습은 단지 명절 예절이 아니라, 불교 신앙에 입각한 사회적 실천인 것이다. 또한, 어떤 가정에서는 키리밧을 사찰에 바치고, 그 공덕을 돌아가신 조상에게 회향하는 의식을 하기도 한다. 이는 윤회의 순환 속에서 조상을 기억하고, 자신의 공덕을 나누는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한 중요한 문화 요소다.

결국 키리밧은 불교의 ‘마음 씻기’, ‘업(業)의 정화’, ‘인연의 공덕’을 실현하는 상징적 음식이자, 실생활에서 불교 철학이 구현되는 매우 독특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변화 속에서의 키리밧 문화 계승과 과제 

 

스리랑카도 도시화와 글로벌화의 흐름 속에서 음식문화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젊은 세대는 패스트푸드나 외식문화에 익숙해져 있고, 명절 음식도 간편식이나 레스토랑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리밧만큼은 여전히 신년의 핵심 의례로 유지되고 있다.

이는 키리밧이 단지 음식이 아니라, 종교적 의식, 가족 전통, 공동체 정체성을 모두 포함한 ‘상징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부 가정에서는 요리를 직접 하지 않지만, 반드시 사찰이나 부모 집에서 키리밧을 함께 먹는 행위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또, 유튜브나 SNS에서도 ‘할머니의 키리밧 만드는 법’, ‘우리 가족의 신년 상차림’ 같은 콘텐츠가 인기를 끌며, 전통의 재발견과 현대적 전승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흐름도 생겨나고 있다.

정부나 문화기관에서는 신년 시즌을 맞아 ‘키리밧 요리대회’, 학교 대상 전통음식 교육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다음 세대에게 불교 전통과 음식문화를 연결하는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이민자 사회에서도 키리밧은 해외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상징적인 음식으로 기능하며, 국적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라는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앞으로의 과제는 키리밧이라는 전통 음식이 상징하는 불교적 가치와 공동체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현대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지속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다. 스리랑카의 키리밧은 단지 밥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 문화, 인간 관계를 아우르는 살아 있는 전통이다.

 

스리랑카의 신년 음식인 키리밧은 단순한 밥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자비와 공덕, 조화와 절제, 나눔과 감사의 정신이 녹아든 상징적 음식이다. 키리밧은 명절을 열고, 공동체를 잇고, 조상을 기리고, 신에게 공양되는 ‘밥 이상의 음식’이며, 오늘날에도 그 정신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다.